우리 집은 언제나 사랑방이 북적였다. 아버지는 사람을 좋아하셔서 늘 손님들을 불러 모았고, 그 때문에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밥상과 술상을 차리느라 고단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피곤과 짜증이 뒤섞인 엄마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여름방학이면 서울에서 온 국민여대 학생들이 봉사단 활동을 하겠다며 우리 사랑방에 묵고 가곤 했다. 그 언니들에게 주인집 딸이라는 이유로 유난히 귀여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귀하던 사탕과 초콜릿을 손에 쥐여 주고, 개울에 데려가 목욕도 시켜주었으며, 무릎이 까지면 빨간약을 발라주던 다정한 모습이 아직도 따뜻하게 남아 있다. 며칠간 함께 지내던 그 언니들이 떠나면, 엄마는 밥과 반찬 걱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아버지는 읍내 조합을 들락거리며 무슨 봉사를 하셨는지 모를 활동으로 마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계셨다. 술을 좋아하시고 사람을 좋아하신 아버지 곁에는 평생 친구들이 많았고, 그만큼 엄마의 수고와 고생은 끝이 없었다.
그렇게 살던 우리 집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부산으로 이사하겠다며 집과 논밭을 모두 정리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공부를 시키려면 도시로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굳었고, 막내는 겨우 돌을 지난 시기였다. 그런데 그 막내가 마루에서 떨어져 머리에 혹이 나고, 곪아 고름이 차면서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병원이 멀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칼을 쓸 줄 아는 아저씨가 막내의 머리를 째 고름을 짜냈는데, 세수대야 한가득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마을이 떠들썩할 만큼 큰 소동이었다. 무지한 치료였지만, 다행히 부산으로 이사 간 뒤 외과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한 달 만에 회복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정리해 부산으로 이사했고, 자식들이 굶지 않게 해야 한다며 하천부지 2천 평을 사셨다. 그러나 농사를 싫어 떠나온 부산에서 또다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리어카에 비료를 싣고 우리를 시켜 밀게 하며 논밭에 비료를 뿌렸다. 억척스럽게 일하던 엄마의 모습과, 늘 여유롭게 술과 친구를 즐기던 아버지의 모습이 대비되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착한 곳은 자식 공부에는 어울리지 않는 선창가 마을이었다. 낙동강을 끼고 조개와 곰장어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는 동네였으니 공부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술친구들과 어울리며 가정보다 바깥 생활에 즐거움을 느끼셨고, 그로 인해 가세는 기울어졌다. 시골에서 정리해 온 재산은 점점 줄어들고, 하천부지는 결국 정부 땅이라 빼앗겼으며, 크게 지었던 집도 도시계획으로 헐려야 했다.
결국 우리는 남의 집 전세살이를 전전하다가, 엄마의 억척스러운 노고 덕분에 중학교 시절 작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엄마는 구멍가게를 열기도 했고, 재래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며 삶을 버텨냈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물건을 떼 와서 파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어린 나이에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엄마를 돕곤 했다.
한편 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면 가족 노래자랑을 열자며 우리를 불러 모았다. 어린 내가 먼저 유행가를 불러야 했고, 술이 깰 때쯤이면 무릎을 꿇고 훈계를 들어야 했다. 다리가 저려 발을 꼼지락거리면 그제야 "펴라" 하시던 아버지의 권위적인 모습은 그 시절 부모라는 이름으로 누리던 절대 권력을 보여준다. 지금 같으면 아동학대라며 신고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졌다.
자존감이 꺾이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자라났다. 억척스러운 엄마의 힘과, 숱한 고단함을 딛고 살아온 세월이 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다.
길 위의 발자국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길위의 발자국 4탄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