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남 합천군의 깊은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농사일을 도와주던 벙어리 아저씨가 함께 살았다. 옛날에는 그런 일을 ‘머슴’이라 불렀다.
두 집 살림의 그림자
할아버지는 양반이라 불리던 분이셨다. 우리 집에도 할머니가 계셨지만, 산 너머 작은집에는 ‘작은할머니’라는 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할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듯하다. 할아버지는 주로 우리 집에서 머무르셨고, 그 일 때문에인지 할머니는 늘 속을 앓으셨다. 기억 속 할머니는 늘 소다를 드시며 위통을 달래셨는데, 지금 와서 추측하건대 신경성 위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모진 세월을 할머니는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눈물 많던 아이
그 시절, 나는 여섯 살쯤이었다. 늘 눈물과 콧물에 젖어 있던 아이. 여름이면 모기 물린 자국을 긁어 부스럼이 나 있었고, 울음은 끊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하셨다. 큰소리로 꾸짖으시면, 나는 겁이 나서 또 울고, 울면 또 꾸지람이 이어졌다. 하루도 울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우리 집에는 딸 넷,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나는 위로 언니 한 명을 먼저 하늘로 보내고 자연스럽게 셋째 딸이 되었다. 옛말에 셋째 딸은 예뻐서 선도 안 보고 시집간다 했는데, 사실 나는 넷째였고, 집에서는 “못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딸만 줄줄이 태어난 집안에서, 또 딸에다가 못난이라며 할아버지의 구박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와의 기억
할아버지는 자주 “저놈의 가시나 때문에 내 명에 못 산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두려워서 울고, 울면 또 꾸중을 듣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예순둘 환갑쯤 되신 할아버지는 ‘간디스토마’라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게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땐 울어야 하는데, 왜 눈물이 안 나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요즘도 친정에서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면, 늘 나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딸이라고 구박받았고, 그 무서움에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얘기다. 친정아버지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네가 그렇게 울음이 많았으니 나중에 가수가 될 줄 알았다.”고 종종 말씀하시곤 했다.
이것이 나의 유년 시절, 삶의 배경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또 다른 발자국으로 남겨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