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 글을 쓴다. 요즘 내가 근무하는 어르신 유치원에서 엄마의 흔적을 자주 찾곤 한다. 모진 세월을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엄마는 85세 무렵, 아버지와의 이별이 큰 충격이었는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몇 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잘 다니던 직장을 내려놓고, 남편의 허락을 받아 시골 합천 엄마 집으로 내려갔다. 엄마를 꼭 다시 걷게 해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재활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깻잎 한 장도 따지 못하는 엄마의 손을 보며 ‘손에 힘을 길러야겠다’는 절실함이 들었다. 그래서 솔방울을 하나하나 바구니에 담게 하고, 깻잎 5장을 따는 작은 훈련부터 시작했다. 엄마는 하기 싫어 투덜거리셨지만, 나는 격려와 설득으로 모질게 재활을 이어갔다. 손끝에 힘이 조금씩 돌아오는 걸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곤 했다.
하루 일과에는 휠체어를 잡고 일어서기, 두 손을 꼭 잡고 서기, 그리고 집 마당에 직접 설치한 철봉을 붙들고 걷기 연습도 있었다. 한 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수십 번이라도 반복했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호통을 치며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기적처럼 변화가 찾아왔다.
6개월쯤 지나, 엄마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깻잎 한 장조차 따지 못하던 손에는 힘이 돌아와 양손을 쓸 수 있었고, 누워서 기저귀를 착용하시던 엄마는 스스로 화장실을 다니게 되셨다. 그날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안정적으로 움직이시게 되자 나는 부산 집으로 모시고 와 ‘어르신 유치원’에 다니게 했다. 아침에 나가셔서 저녁에 돌아오시는 생활. 처음엔 정말 즐거워하셨다. “오늘은 장구 치는 사람들이 와서 신나게 놀았다”, “친구들이 많아서 참 재미있다” 하시며 마치 아이가 유치원 다녀와 엄마에게 일과를 들려주듯 이야기하셨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그러다 가끔은 가기 싫다고 떼도 쓰셨다. “거기 가면 다 정신없는 사람들이잖아, 나는 안 간다” 하시며 버티시기도 했다. 나는 치매 예방을 위해서라도 가셔야 한다며 설득했지만, 엄마는 늘 “난 그런 병 안 걸린다, 입에 담지도 마라” 하셨다. 가끔 억지로 보내드리던 날엔, 과연 그게 엄마를 위한 길이었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지금 내가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 보면, 엄마가 그 공간에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떠올리게 된다. 재미있을 때도 있었겠지만, 하루 종일 갇힌 듯한 답답함도 컸을 것이다. 시골 공기 좋은 곳에서 살다 좁은 공간에 앉아 있어야 했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공부를 즐기는 분들도 계셨지만, 엄마는 늘 “젊을 때도 안 하던 공부를 지금 왜 하노, 나는 공부 싫다” 하셨다. 분명 지루한 나날이었을 거라 생각하면, 내가 편해지려고 엄마를 보낸 건 아니었나 하는 죄송함이 밀려온다.
그땐 나도 남편과 아이들을 챙겨야 했기에 시골집에서 엄마와만 함께 지낼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조금 더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쉽고 후회된다. 이제는 내가 여유가 있어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함께할 땐 몰랐던 것들이 문득문득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날들이 많다.
오늘도 나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엄마의 발자국을 찾았다. 살아 계실 땐 힘겹게 함께 걸었던 길이 이제는 그리움의 발자국으로 남아 마음을 저민다.
다음 이야기는 7탄에서 계속된다.